[명사 칼럼] 농월정(弄月亭)
[명사 칼럼] 농월정(弄月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2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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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의 은유와 해학을 중심으로 장을 펼치고자 한다.

옛 선비들은 글을 많이 읽었다. 주로 공자, 주역. 맹자, 노자, 도덕경, 한비자. 주자, 이런 분들이 남긴 여러 저작(著作)들을 옛날 선비들이 즐겨 읽었기에 동양의 고전이 되었고 동양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사라지지 않고 읽히고 있는 것은 이 저작들이 세상의 중심과 이치를 잡아주는 기본과 틀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관리(官吏)를 선발하는 과거장(科擧場)에는 제목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시(詩)나 논설(論說)을 적어내는, 정답이 없는 주관(主觀)식의 훌륭한 답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동양철학이 사라지지 않고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은 그 가치가 현대에도 인정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필자는 고전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딱딱한 고전 속에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하는 해학적(諧謔的) 흔적을 많이 찾아보게 된다.

이런 해학적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畵家)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혜원(蕙園) 신윤복이다. 그의 그림에는 양반 선비들의 원초적(原初的) 본능(本能)을 행동으로 표현한 장면을 그린 작품이 많았다.

그중 <월하정사(月下情思)>라는 작품은 현대 미술사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남녀가 달빛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노골적이지만 추하지 않고 선비의 체통을 버리지도 않은 명작(名作)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대문학에도 이육사의 시(詩) <청포도>에 나타나는 ‘하얀 손수건’이란 단어는 이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는 은유(隱喩)의 단어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육사는 고향이 경북 안동이고, 집안은 퇴계의 후손 진성이씨 가문이다. 그의 시에도 동양 고전(東洋古典)인 퇴계의 철학이 숨어있어 그 깊이와 가치를 더해준다.

또한, 당시 그들이 사용한 단어에는 해학적(諧謔的)으로 표현한 흔적들이 적지 않다. 은유법(隱喩法)을 사용한 표현에 ‘농월정(弄月亭)’이란 단어가 있다.

‘롱(弄)’이란 단어는 희롱(戱弄)할 ‘롱’자다. 남자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놀다가 책임 없이 내버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글자다. 이 단어는 선비로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금기적(禁忌的) 단어이기도 했다.

양반집 선비가 남의 집 딸이나 며느리, 특히 일찍 과부가 되어 수절(愁絶)하는 아녀자를 가지고 놀다가 책임 없이 내던지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큰 범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희롱을 해도 달(月)을 희롱하는 것은 범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니, 이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그 농월정이 함양 안의면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육십령을 따라 흐르는 하천에 자리 잡고 있다.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하천의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은 가히 선비들이 즐겨 찾을만한 곳이기도 했을 법하다.

하늘에 뜬 달은 주인이 없다. 아니 달의 주인이 너무 많다. 그 달을 쳐다보면 모두가 주인이다. 더불어 이런 곳에서 시(詩)를 읊으며 흥을 돋우기에 이만한 장소는 드물었을 것이다. 하늘에는 달이 있고, 물 좋고 바위 좋은 곳에 세운 정자 이름이 다름 아닌 ‘농월정(弄月亭)’이다.

박현수 울산향교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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