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海山의 얼기설기] 다시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徐海山의 얼기설기] 다시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27 2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 배운다고 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진정한 배움은 역사와 경험, 양쪽 모두의 섭렵이라고 정의했다. 역사의 산지식은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처럼 우리 주변에는 로마 이야기와 관련된 격언이 많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식의 저변에 로마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본받을 정책으로 육영제도와 인프라 구축, 출산장려정책, 그리고 법과 제도를 꼽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자립을 위한 육영제도인 ‘알리멘타’는 원래 퇴직 고위 관리가 개인적으로 빈곤층 아동 지원을 위해 시작했지만, 국가 시스템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로마의 유적을 살펴보면 현대 문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인프라에 감탄하게 된다. 모든 도시에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중목욕탕을 완비했으며, 맑은 물을 공급하는 수도시설 덕분에 로마는 질병이 매우 적었다. 소독약이 없던 시대에 청결한 수질 유지를 위해 그들은 ‘물을 계속 흐르게 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상수도에 더해 하수도망까지 완벽히 갖추려 노력했다.

로마의 출산장려정책 변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국력이 융성하던 기원전 2세기 전까지 로마에서는 다산(多産) 여성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 시대에 접어들어 출산율이 떨어지자 출산장려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혼 여성들에게 독신세를 부과했고, 또 능력이 같은 경우 아이가 많은 남성을 공직에 우선 등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덕분에 로마의 인구는 줄곧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저출생으로 인구소멸 위기에 직면한 지금, 과거 로마의 정책을 따를 순 없지만, 위기 극복을 위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려 노력했던 로마인의 적극성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만하다.

법과 제도도 로마의 번영을 뒷받침했다. 신속한 재판을 위해 1년에 320일이나 법정을 여는 것과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자녀를 낳으면 30일 이내에 신고하는 것을 의무화한 법률 등이 있었다. 또한, 로마제국은 통화의 도구인 금화나 은화, 동전에 알리고자 하는 정책을 새겨 선전 매체로 적극 활용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비범한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연설을 잘하고 못하고는 사용하는 낱말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글은 사람이고, 글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지도자에게 중요한 자질은 설득력이고, 그것을 발휘하려면 적절한 어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강조했다.

로마의 융성은 로마인의 ‘개방성과 실용성’ 덕분이었다. ‘지성에선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선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선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선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다’라고 로마인은 겸손하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해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민족에 대한 개방성과 유연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번성했던 로마가 쇠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은 내부적 요인으로 자멸했다고 봤다. 영토는 너무 넓어 비대해져 분할 통치의 효율성을 잃어버렸고, 황제의 타락과 무능, 관료의 부패, 오랜 평화에 따른 군사력 약화와 함께, 체제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서 로마의 몰락을 초래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제국은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크게 흔들리는 약체로 전락했다. 천년 제국 로마의 흥망성쇠를 다룬 15권의 로마인 이야기를 봄꽃 흩날리는 계절에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徐海山 에세이스트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