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어떤 사랑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어떤 사랑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2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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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체가 스포일러입니다.

소년은 아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하굣길에 비를 피해 낯선 건물 처마 밑으로 기어든 데이빗 크로스는 구토를 해댔고,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케이트 윈슬렛은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보살핀다. 죽을 거 같았던 소년은 여자의 보살핌에 이내 진정이 됐고, 왠지 슬퍼 보이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 역시 보살핌이 필요해 보임을 직감한다. 어느새 비는 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사랑에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여자가 고마웠던 소년은 꽃을 들고 여자의 집을 찾아가게 되고, 우연히 훔쳐보게 된 여자의 농익은 자태에 심장이 두근대 미칠 것 같았다. 훔쳐보다 들켜버린 소년은 여자에게서 도망치지만 왠지 이번엔 제대로 아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소년의 예감은 비켜나지 않았다.

이미 빠져버린 마음에 다시 여자 집을 찾은 소년. 여자는 소년이 다시 찾아온 이유를 잘 알았고, 쿨하다고 하기엔 어딘가 슬퍼 보일 정도로 과감하게 소년을 유혹한다. 그렇게 여자와 소년은 연인이 됐다. 여자는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겼고, 소년은 이제 고작 열다섯이었다. 바야흐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을 조금 더 넘긴 어느 겨울의 독일 작은 도시였다. 그랬다. 어린 소년을 무차별 탐한 여자가 나치 독일이라면 소년은 연합국 같았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댔을 땐 나치 독일의 침공이나 어린 소년을 유혹한 여자나 나쁘긴 매한가지. 다만 전범국가의 국민으로 여자는 전쟁을 겪었고, 전쟁통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나쁜 짓’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자가 어린 소년과 침대에서 아무리 뒹굴어도 전쟁보다 추악하고 나쁠까. 차라리 히틀러를 욕하시길.

헌데 전쟁통에 겨우 살아남았다고 해도 여자에게 있어 자존심은 목숨보다 소중하기 마련.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여자는 소년에게 관계를 갖기 전 책을 읽어달라고 했고, 어느 날 학교에서 또래 여자아이의 유혹에 잠시 흔들렸던 소년의 평소와는 다른 책 읽는 소리에 여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내친다. 이유도 모른 채 집을 나온 소년은 그 뒤로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다. 말도 안 하고 이사를 가버린 것. 소년은 다시 아팠다. 하지만 성홍열로 구토를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픔이었다. 첫사랑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어엿한 청년이 된 소년은 법대생이 됐고, 재판을 방청하러 법원에 갔다가 깜짝 놀라고 만다. 첫사랑이었던 그 여자가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서 있었던 것.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버려 그때 그 소년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던 만큼 청년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정에서 드러난 여자의 죄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여자가 청년의 나이였던 시절에 그녀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활동했고,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재판은 다름 아닌 전범 재판이었던 것. 그렇게 청년의 애틋했던 첫사랑은 그가 전후 세대였기에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속죄의 역사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여자는 법정에서 당당했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추궁하는 판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살기 위해선 감시원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그랬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을 아프게 했던 궁극의 실체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괴물이었다. 청년이 첫사랑을 아름답게 간직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상대였고, 해서 그는 더욱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이젠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를 향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생각을 묻는다. 그러자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느낌은 중요하지 않아. 내 생각이 어떤지도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순간, 이젠 중년의 변호사가 된 랄프 파인즈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사람, 그때 나를 버리고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허나 괴물이 날뛰던 세상에서 살아남은 여자로서 감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했을 터. 어린 소년을 탐했던 자신의 욕망도 어차피 괴물 같았기에 아무 말없이 소년을 떠났던 게 아닐까. 다시 살기 위해. 그래도 사랑은 사랑. 억지로라도 죄책감을 외면하며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에 진심을 다해 책을 읽어줬던 소년에게 속죄를 하듯, 또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여자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래도 여자라고. 한때나마 소년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리고 참혹한 불멸의 역사에 갇혀버린 소중한 첫사랑 앞에 미워도 미워할 수 없었던 여자를 위해 중년의 소년은 오열한다. 그래도 첫사랑이라고, 아니, 그것도 사랑이라고. 어떤 사랑은 그렇다. 애초에 감당이 안 된다. 2009년 3월 26일. 러닝타임 123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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